진정한 태평천하를 꿈꾸며!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나 국어 시간에 보고 들었던 태평천하라는 소설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몇 바닥에서부터‘우와’하는 감탄사가 나왔고 한달음에 마지막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왜 이제야 읽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일제 치하를 거치며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저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었을지 궁금했고 글이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약간 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 읽히는 것이었습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화자가 ‘습니다’ 체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신기하고 반갑기도 했으며 그래서 읽기가 더 편했던 것 같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제가 주로 읽는 책들은 거의 번역서가 많았습니다. 작년 봄 즈음 도올 선생님이 쓴 몇 권의 책을 보면서 어찌 그렇게 잘 읽히든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하!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이어서 그렇구나! 하고 제 나름의 해석을 했었습니다. 채만식 선생님의 글도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이라 더 다가왔을까요? 그동안은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상황을 미루어 선뜻 책을 잡지 못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젊은 날에는 왠지 시대적 아픔을 접하기가 조금 어려웠고 어떤 마음의 대비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태평천하’로 인하여 그 막연히 가지고 있던 기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지나온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였습니다. 곳곳에서는 아련한 통증 같은 것도 느껴졌지만 앞으로 그 시대의 글 들을 좀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체나 말이 전라도 방언 같은데 신기하게도 경상도에서 자란 제가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습니다. 어원이 같아서일까요? 어머니가 자주 사용하시던 말씨와도 비슷하여 곳곳에서 엄마를 떠올릴 수 있어서 더 반가웠으며, 책 전반을 채우는 대화체가 어려움 없이 쉬 읽혔습니다. 물론 그 긴 이야기를 쓰면서 끝까지 ‘습니다’,‘합니다’,‘입니다’라는 말투를 버리지 않는 부분이 무엇보다 정감이 있어서 쉼 없이 책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저도 지금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흔헌 물으다가 북북 씻어서”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아주 어릴 적 열 살 미만이던 우리 연년생 자매가 처음 밥을 하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바가지에 쌀, 보리를 담아 씻어 처음 밥을 앉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작을 하러 간 부모님이 해가 져도 오지 않아 언니와 같이 고사리 손으로 밥을 했었던 겁니다. 늦은 밤에 논에서 돌아온 엄마가 딸내미 둘이서 불을 지펴 설익은 밥을 해놓은 것을 보고 얼마나 대견해 하시던지 그 이후로 그 일은 엄마의 즐거운 회상이 되었었습니다. 마당에 얹어놓은 솥단지 밑에 솔잎 깔비로 불씨를 피워서 나무를 주워 넣어가며 평소 보던 대로 불을 피운것입니다. 언니가 쌀과 보리를 씻어서 앉히고 나는 콩밥을 하자며 마른 콩을 씻어서 얹었습니다. 큰언니와 오빠, 그리고 엄마 아버지 네 명이 새벽부터 밤까지 대여해온 트랙터를 발로 구르면서 타작을 하고 그 쌀을 싣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아마 한참 늦었었겠지요. 늦은 밤에 온 식구가 설익은 밥을 먹었을겁니다.
“혀를 끌끄을 차다가”라는 말에서는 나도 모르게 “끌끄을” 따라해 보았습니다. “미닫이를 타앙 열어 젖히고, ....숟가락을 밥상 귀퉁이에다가 내동댕이를 쳤고요”라는 표현을 비롯하여 책 전반의 묘사는 마치 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했습니다. “단산할 나이”“여자 아닌 여자로 변하는 때”라는 표현들에서는 갱년기를 접어든다는 말이 이렇게도 표현이 되는구나 싶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말처럼 긴 얼굴을 소처럼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섭니다”라는 표현에서는 나도 얼굴이 긴대 싶어서 옆에 있는 거울로 시선이 갔습니다. 소처럼 웃는다는 건 또 어떤 얼굴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깊은 인정의 기미를 통찰할 재목이 되나요”라는 표현에서는 한동안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책에서는 모자라는 아들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지만, 사람으로 나서 누구나 똑같이 한 삶을 사는데 한 분야의 전문가는 못될지라도 최소한의 사리와 이치는 깨워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자각이 들게 했습니다. 정말 줄기차게 배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말미 부분으로 갈수록 옮겨쓰고 싶은 좋은 문장이 참 많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새로운 날이 밝고, 밝은 그 새날은 그네들에게 다시 어떠한 생활을 주려는지’는 오지 않은 날에 대한 설레임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여기 좀 봐 보라고, 지금 많이 힘들어도 오래지 않아 새로운 날이 밝을 것이고 그 밝은 새날은 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느냐며 두드려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우리한테 새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어제와 꼬옥 같은 것만 되풀이를 한다면, 참으로 우리는 숨이 막히고 모두 불행할 것입니다’는 말은 얼마나 멋있던지 오늘은 뭔가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들면서 오늘은 온전히 나한테 달려있다는 기분좋은 무게가 실려왔습니다. ‘인간은 늙어 백발로, 백발은 마침내 무덤으로 .. 이렇게 하염없어도 인류는 하루하루 더 재미있어 간답니다.’라는 표현에서는 가슴이 두둥실 부풀어졌을 뿐 아니라 이래서 소설을 읽게 되는구나 하는 묘미에 빠지게 했습니다.
책 분량에 비하여 내용은 단 몇일 동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증손자부터 손자, 아들, 주인공 윤직원 영감, 그리고 그의 처, 며느리 고 씨, 손자며느리 2명과 딸인 서울 아씨 등이 등장하지요. 3~4대의 한 가족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 마치 한편의 연극 같기도 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친숙한 이야기이며 그 시절 어렵게 살았던 민중들의 생활이 절절이 다가왔습니다. 증손자와 동갑내기인 춘심이를 두고 벌이는 윤직원 영감의 행동 묘사 부분과 손자 윤종수가 부친의 서울 애첩과 대면하는 장면에서는 대소가 나왔습니다.
윤직원 영감이 동학에 대하여 품는 분노를 보며 느낀 안타까움은 마지막에 또 느껴졌습니다. 신교육을 배우러 간 손자 종학이 사회주의에 심취한 기별을 듣고 벌이는 윤직원 영감의 절망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3~4대에 걸쳐서 유일하게 최고의 엘리트로 공부하러 간 손자가 사회주의 사상에 발을 디딘 소식은 이야기 흐름에서 일말의 관심과 기대를 품게 하는데 윤직원 영감은 세상이 끝난 듯이 울부짖습니다. 사회주의를 불한당패나 없는 자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일제 치하를 태평천하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황당함을 넘어 슬픔이 일었습니다.
태평천하의 전체 줄거리는 구수한 대화체 사투리와 화자의 평이한 설명으로 쉽게 넘어갑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으면서 끝까지 따라오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입니다. 아들, 손자와 부대끼며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가사 일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며느리, 딸은 밥 짓고, 옷 짓는 일에 한정되어 있고 몇몇 등장하는 여성은 첩이나 기생으로 표현됩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거의 없었고 사회적 기회도 적었기에 그 당시 여성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남자의 시선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의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커다랗게 남았습니다. 지금도 그때와 크게 변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모습 때문에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의문과 숙제를 안은 듯한 느낌이 왔습니다.
구한 말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에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을 사회활동에 등용하는 것이 조선이 독립하고 세계 강국으로 가는 기본 지름길이라고 했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여성의 교육열과 사회 참여율은 전체의 절반이 되었지만 일련의 여러 상황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너무 야박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접한 사람들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여성의 삶에 관심을 한번 가져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태평천하’ 이야기는 하아얀 명주·삼베옷 입고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아간 조상님들의 삶을 한번 들여다 본 듯 뿌듯함과 감사함과 뭉클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 하겠지요. 이제는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일 것 같습니다. 국민소득 4만불의 경제대국에 맞게 이제는 여성을 포함하여 약자를 돌아보고 사회를 치유하는 노력도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독서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백꽃- 김유정] '아름다운 청춘 이야기' (0) | 2022.10.24 |
---|---|
[독서모임-하고재비!] '함께해서 좋은 책읽기 모임! (0) | 2022.10.23 |
[홍계월전 - 고전] '남녀의 차이를 다시 생각해보다' (0) | 2022.10.23 |
[독후기] '어른이 되면'(2) - 장혜영 (0) | 2022.08.24 |
[독후기] '어른이 되면'(1)- 장혜영 (0) | 2022.08.23 |